학교의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은 꽤 길어 해에 닿는 시간이 갈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있다 갈 거기에 양산을 챙겨오지 않았고 맨몸으로 언덕을 내려가던 레이는 고운 미간을 찌푸리면서 가져오지 않은 양산을 절실하게 떠올렸다. 한참을 내려왔을까 비틀거리며 레이는 교문 앞에서 벽을 짚고 한참을 서 있다가 버스 정류장까지 힘내서 가보기로 했다. 서 있다가는 모양 없이 기절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것만은 막겠다는 집념으로 레이는 발을 옮겼다. 힘겹게 걸어 버스정류장에 다다라 레이는 정류장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아무것도 가려주는 게 없는 땡볕에 있는 것보단 나았지만, 정류장에서도 상태는 그다지 회복되지는 않았다. 위험하다고 느낄 무렵 레이의 앞에 그늘이 졌다. 한결 살 것 같다는 느낌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괜찮으세요?”
앳된 어린 목소리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지만 왠지 모르게 듣기 좋았다. 어쩐지 모르게 듣기 편한 자장가 같기도 했다. 찌푸려졌던 미간이 풀려 조금 편안한 얼굴을 할 수 있었다.
“네 녀석.”
“네?”
“이 몸 앞에 있는 너 양산 같은 게 있다면 빌려줘.”
“양산...? 인가요... 아!”
그냥 해본 소리였다.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어린애가 양산을 가지고 다니지 않을 테니 자신의 앞에서 잠깐이라도 해를 가려준 걸로 나름 괜찮았다. 레이의 말에 아이는 무언가 깨달은 느낌의 탄성을 내며 가방을 부스럭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팡하는 뭔가를 피는 소리가 났고 아이는 눈을 가리고 있는 레이의 손을 떼고서 그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우산 아래 눈이 마주쳤다. 붉고 붉은 레이의 눈에 푸른 바다가 살짝 일렁였다. 아이는 바다를 숨기고 레이의 앞에 웃었다. 잡힌 레이의 손에는 우산이 쥐어졌다. 아득한 정신으로 레이는 일련의 과정에 휩쓸리듯 넘어갔다. 아이는 어느새 레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레이는 멍하니 손에 들린 우산을 바라보다가 약간의 헛웃음 하고서 우산을 썼다.
“어이어이 양산 같은 걸 빌려달라고 했더니 우산이냐.”
“가장 양산과 비슷해서.”
“이상한 녀석이네 이런 날 보통 우산 가지고 있냐?”
“어쩌다 보니까 가지고 있네요.”
희한한 답변 속에 레이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아이를 봤다. 갈색의 단발보다 약간 긴 머리에 끈 리본을 쓰는 세일러 교복. 아 키미사키 학원인가. 분명 자매결연 맺은 학교 중 하나였던가. 자료에서 본 적이 있는 것도 같고. 흐릿한 기억에 레이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자료의 기억을 떠올릴 때쯤 아이가 입을 열었다.
“이 학교 다니시는 건가요?”
“아 뭐.”
“어때요? 학교는 재밌나요? 즐거워요?”
아이의 바다가 반짝거리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바다였다.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재밌다. 즐겁다. 인가. 재밌었다. 즐거웠다. 가 아니고? 입을 떼기가 조금 어려웠다. 말이 없는 레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아이는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가방을 다시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약간 뒤적거리다 손에 잡혔는지 즐거운 얼굴로 아이는 빨간 병을 꺼냈다. 아니 빨간 액체가 담긴 병을 꺼냈다. 그리고서는 레이에게 병을 건넸다.
“드실래요?”
레이는 이상한 얼굴로 아이와 병을 번갈아 바라봤다. 대체 뭐하는 애지? 가방에서 이상한 게 나오잖아. 레이의 눈초리가 이상하자 아이는 퍼뜩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이상한 건 아니고 그 토마토주스에요 아침에 동생에게 도시락과 같이 주려고 했는데 동생이 안 가져가서 두 개나 가지고 있어서 이상한 거 안 넣었으니까요!”
최선을 다해 설명하는 아이에 레이는 살짝 웃음이 터졌다. 자기가 뭐라고 이렇게 열심히 설명하고 마시게 하려는 건가. 처음 본 사람이니 그냥 안 주면 그만 인 것을. 아 마시게 해야 하는 건가. 뭔가 이상한 게들 어 있을 수도. 일단 아이돌이니까. 알아보고? 뭔가 나쁜 의도로는 안 보이지만 팬 같은 느낌으로는 안 보이지? 레이는 잠시 고민을 하다 아이의 손에서 찰랑 거리는 토마토 주스 병을 레이는 손을 뻗어 가져갔다. 토마토주스 마시고 싶었단 말이지. 레이는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서 병을 열어 토마토주스를 한 모금 넘겼다. 혀에 닿는 토마토의 맛이 괜찮았다. 아니 꽤 좋았다. 시중에 파는 것보다 깔끔하게 넘어가고 진하게 닿는 맛이 레이의 맘에 들었다.
“괜찮으신가요?”
“아 네 녀석 꽤 하잖아.”
“얼굴빛이 안 좋아 보이셔서 드릴 게 없고 토마토주스라도 드시면 괜찮을까 싶었는데 다행이에요.”
“이대로만 하면 네 녀석 괜찮다고.”
아이는 눈을 접고 기쁘게 웃었다. 레이가 깔끔하게 주스 병을 비울 때까지 아이는 무언가 음을 흥얼거렸다. 들어본 적 없는 노래였다. 본인에게는 익숙한 노래 같았다. 몇 번 정도 반복되었을 때 병에서 붉음이 사라졌다. 병을 옆에 놓는 소리와 함께 아이가 입을 열었다.
“뭔가 자신이 없었는데 괜찮다고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아까와는 달리 좀 희미하게 먼 곳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아이는 앞을 보고서 그리 말했다. 바다가 깊어진 느낌이 났다. 단지 토마토주스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레이 본인은 그리 느꼈다. 어딘가 모르게 자신과 닮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의 손에는 붉은 토마토주스 병이 들려있었다.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아이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가방이 들렸고 우산을 든 자신의 앞에 아이는 서 가볍게 목을 숙이고서 자신의 손에 있는 토마토주스 병을 레이에게 안겨주었다.
“우산은 가지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해에 약하신 거 같고 아 주스 남은 한 병도 드릴게요. 그럼 이만 몸 조심히 하시길.”
아이는 천천히 레이에게서 멀어져갔다. 레이는 아까 아이가 왔을 때처럼 일련의 과정을 멍하게 흐르듯 넘기다가 팍하니 정신을 차렸다. 우산을 그냥 주고 주스도 또 주다니 이상하기 짝이 없는 아이다. 정말 뭔가 다른 게 있는 건 아닐까. 도움은 의심을 풀기 위한 거고 두 번째에 진짜 무언가 들어있다거나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의심이라기보다 신중이다. 아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이쪽의 정신이 아주 좋지 않았다. 겪은 상황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 이 정도는 봐달라고. 신중한 거다. 신중.
“자, 잠깐 기다려!”
아이가 멈춰서 뒤돌아보자 맑은 바다와 눈이 맞았다. 사실은 의심이고 신중이고 뭐고 그냥 붙잡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이 몸에게 하고 싶은 말 같은 건?!”
내뱉고 나서 레이는 정확히 3초가 지나고 후회를 했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했는가. 아무리 할 말이 없어도 이건 아니지. 아이와 맞았던 눈을 피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이의 시선이 레이에게 빤히 닿아있었다. 발소리가 났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어느새 레이의 앞에 그늘이 졌다. 자장가 같은 상냥한 목소리가 가까이서 울렸다.
“예쁘시네요? 아니 아름다우시네요.”
레이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허탈한 소리를 내며 아이를 돌아봤다. 아이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얼굴에는 어떠한 것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본인이 본 걸 느낀 대로 이야기했다고 그리 말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의심한 저가 조금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있는 그대로의 맑은 모습이었다. 조금은 글렀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의 호의에 의심을 해버리는 제가. 정말 저에게 남은 건 지독한 악명뿐이라고 인지가 확실하게도 되어버렸다. 웃음이 비실 세어 나왔다.
“아 저기...?”
웃는 레이의 앞에서 아이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레이를 바라봤다. 레이는 고개를 돌려 아이와 마주했다. 여전히 바다는 푸르렀다. 무언가를 말해주어야겠다고 레이는 생각했다. 우산을 내려놓고 주스 병을 옆으로 두고 레이는 손짓으로 아이에게 좀 더 가까이 오라 말했고 아이의 순순히 레이의 말대로 레이 쪽으로 몸을 좀 더 기울였다. 낯선 남자가 무엇을 할 줄 알고 해달라는 대로 몸을 기울여주는지. 역시 별난 아이다. 레이는 손을 뻗어 아이의 하얀 볼을 어루만지다 목덜미를 그러안고 당겼다. 아이의 몸이 레이 쪽으로 확 기울었다. 아이의 볼에 입술이 닿을 만큼 레이가 가까워졌다.
“네 녀석 경각심 같은 걸 가지라고. 사람이 너무 좋아도 곤란해 이런 일이라도 생기면 어쩔 건데.”
아이의 볼에 아주 살짝 레이의 입술이 닿았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아주 잠깐의 시간 아이의 볼에 레이의 입술이 머물렀다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러안고 있던 아이의 목덜미도 놔주었다. 아이가 멍해 있는 동안 레이는 떨어진 우산을 접어 아이의 손에 들려주고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그런 네 녀석 덕분에 지금 괜찮은 거 같지만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우산은 됐고 이 날씨에 쓰면 미친 사람처럼 보일 테니까. 토마토주스는 가져간다. 또 보자.”
호쾌하게 웃으며 레이는 의자 옆에 놔두었던 토마토주스 병을 들고서 정류장을 먼저 나섰다. 햇빛에 토마토주스가 찰랑거리며 빛났다. 반짝이는 토마토주스인가.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정류장을 나서면서 슬쩍 본 아이의 얼굴이 이와 같았다. 사랑스럽다고 여겼을지 모르겠다. 아이의 다른 얼굴은 어떨까 호기심이 일었다. 다음에 만나면 이름과 함께 많은 것을 물어봐야겠다고. 그 전까지는 이 몸의 어린 소녀인 걸로.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타나 이상한부분은 자주자주 수정하러 올 예정입니다 볼 때마다 틀려질 수도 있어요
*주제와 멀어진 것 같지만 뭐 뭐....그냥 그런 걸로....하하하하
*랄까 뒤에 둘이 더 만났으면 좋겠는 마음이 있습니다
한 4번 정도 쯤? 뒷편을 써놓고 일단 나중에 생각해보는 걸로
만나면 좋겠으니까요
*오레사마 할배 멋있기도 한데 솔직하게 어렵...고 어려운 네
죄송합니다 그런 멋있는 할배 제가 쓰면 안되는건데 망쳐버려써ㅠㅠㅠ
*안즈랑 할배의 닮은 점이 좋아요 과거의 모습이
*역시 둘이 과거에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 있습니다.
단발의 안즈와 오레사마 레이 만났기를
*소녀보다는 아이라는 어감이 레이가 말할 것 같고 어렵네요 역시나ㅠㅠ
*문의는 트위터(@pogeun_anzu)로 부탁드립니다
'밤하늘의 카논 2 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츠안즈] 그렇게 눈은 달았다 (0) | 2016.11.13 |
---|---|
[리츠안즈] 당신과의 밤이 평소의 낮보다 아름답기를 (0) | 2016.10.30 |
[레오안즈] 우주를 건너 (0) | 2016.09.25 |
리츠안즈 영업글4 : 유메노사키 체육제2 - 심층연구본 (0) | 2016.09.22 |
[이즈안즈] 이미 겪어본 가을이 주는 쓸쓸함에 대하여 (0) | 2016.09.11 |